정할 수 있는데 정하지 않은 것들

회의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가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입니다. 규정이 그렇다, 상위 기관의 승인이 필요하다, 전례가 없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온 뒤에 실제로 규정을 찾아 확인해 보면, 정할 수 있었던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도 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게으름도 아닙니다. 오래 허락을 구하며 일해 온 조직은 허락이 필요 없는 영역에서도 허락을 구하게 됩니다. 규제가 사라진 뒤에도 규제의 습관은 남습니다. 그 습관을 인정하는 데서 자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편의 글이 모두 같은 목록이었습니다.
행정에 전문성이 축적되도록 경력 경로와 인계 체계를 바꾸는 일. 결정의 근거가 된 자료를 결정과 함께 공개하는 일. 학부와 대학원의 관계를 조직 차원에서 다시 설계하는 일. 대학이 가진 자산을 어떻게 쓸 것인지 정하는 일. 다섯 캠퍼스가 각각 어떤 종목을 뛸 것인지 규정하는 일. 이 가운데 바깥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대학이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왜 정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대개 책임에 있다고 봅니다. 정하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는 아무도 틀리지 않습니다. 권한을 쓰지 않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안전한 선택이고,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수원이 그렇습니다. 그 캠퍼스를 무엇에 쓸 것인가.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하는 쪽은 우리였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올려놓고 답을 내릴 자리가 대학 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리가 없으면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그냥 오래 남습니다. 스무 해가 그렇게 지났습니다.
그러나 권한과 책임은 하나입니다. 자율이란 스스로 정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겠다는 말입니다. 책임을 나누어 지지 않는 자율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학이 밖을 향해 자율을 말할 때, 그 말의 무게는 안에서 얼마나 행사했는가에서 나옵니다. 안에서 쓰지 않는 권한을 밖에서 더 달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외적인 자율은 대내적인 자율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자율에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대학이 자기를 위해서만 자율을 요구하면 사회는 그것을 특권으로 읽습니다. 자율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 되려면, 그 자율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대학 바깥에도 설명되어야 합니다. 지역의 대학들과 함께 일하는 일, 대학 담장 밖의 과제에 응답하는 일이 곧 그 설명입니다. 서울대학교가 혼자 잘하기 위한 자율이라면 지켜야 할 이유가 약하지만, 고등교육 전체와 사회를 위한 자율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