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자의 요구, 그리고 대학의 응답 — 1,000억 연구기금 유치의 행정 공학

10년 안에 노벨상과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해 주십시오.

좋은책신사고 홍범준 대표가 1,000억 원 기부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그 야심찬 한 문장이었습니다. 국내 민간 단일 연구기금으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였고, 기부자가 요구한 것은 그 금액에 상응하는 세계 최정상의 결과였습니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

자연과학대학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겠습니다. 노벨상과 필즈상은 외부의 지침을 충실히 수행한 연구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방향을 놓지 않은 연구자에게 주어집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결과를 내기 위한 전제 조건은 통제의 강화가 아니라 자유의 보장이라는 것, 이것이 대학이 기부자의 요구에 내놓은 행정 철학이었습니다.

이 응답이 가능하려면 뒷받침하는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유치 과정에서 자연과학대학이 설계한 것은 외부 평가 지표로부터 독립된 자율 연구 지원 체계였습니다. 단기 성과보다 과정을 존중하는 심사 기준, 연구자가 중간에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집행 구조, 그리고 행정이 연구에 개입하지 않는 운용 거버넌스. 기부자의 목표와 대학의 방법론이 공명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한국 연구 생태계가 오랫동안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는 이 사례의 반면에 선명히 드러납니다. 정부 과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연구자는 선정 가능한 주제를 고르게 되고, 평가 지표에 맞는 결과를 내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10년의 지평을 놓고 최초의 질문을 파고드는 기초과학의 심층 탐구는 이 구조 안에서 설 자리를 잃습니다. 1,000억 무주 쎈 연구기금이 연 선례는 바로 그 구조에 균열을 내는 실증입니다.

대학 재정 자립은 모금 역량의 문제이기 이전에 철학의 문제입니다. 대학이 무엇을 위해 연구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가진 기관만이, 그 답에 공명하는 후원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야심찬 목표를 요구한 기부자에게 가장 근본적인 방법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이번 유치의 본질이었습니다.